공산주의와 공산혁명은 인류사에서 거대한 비극이었다.
수많은 희생을 낳았고, 실제로 많은 경우 자유를 억압하는 체제로 귀결됐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바로 그 공산주의의 등장과 혁명적 압력이
19세기 말~20세기 초 자본주의의 가장 잔혹한 문제들을 빠르게 수정하게 만든 것도 사실이다.
산업화 초기의 자본주의는 지금 우리가 익숙한 모습과 전혀 달랐다.
장시간 노동, 아동노동, 열악한 주거 환경, 극단적인 빈부격차, 사회보장 부재가 흔했다.
이 상태가 계속되었다면 자본주의는 내부 모순으로 더 큰 폭발을 맞았을 가능성이 컸다.
바로 그때 공산주의 운동과 공산혁명의 위협은
자본주의 국가들로 하여금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를 개혁하게 만들었다.
노동권 강화, 복지국가의 확대, 사회보험, 공공의료, 재분배 정책은
단순한 ‘선의’의 산물이라기보다, 혁명을 막기 위한 체제 방어의 결과이기도 했다.
즉, 오늘날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는
공산주의가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세계의 자본주의가 아니다.
공산주의라는 거대한 도전이 있었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더 이상 순수한 laissez-faire 체제로 남지 못했고
케인즈주의, 복지국가, 사회민주주의적 조정 장치를 흡수하며 살아남았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남한의 건강보험과 각종 사회정책은 단순히 경제성장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냉전 체제 속에서 북한의 ‘무상의료’, 토지개혁, 사회주의적 동원 모델은
남한으로 하여금 체제 경쟁 차원에서 복지와 분배를 일정 부분 강화하게 만드는 압력으로 작용했다.
이승만 정권기의 토지개혁 역시
단순한 개혁 의지라기보다 공산주의 확산을 막고 체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성격이 강했다.
결국 북한의 존재와 공산주의의 위협은,
남한이 최소한의 분배와 사회통합 장치를 갖추게 만드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정리하면, 공산주의는 그 자체로는 비극이었지만
그 존재 자체가 자본주의를 더 인간적으로 바꾸는 압력으로 작동했다.
우리는 공산주의 체제에 살고 있지는 않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공산주의가 남긴 역사적 압력의 간접적 수혜를 받고 있는 셈이다.